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량 해전 (문단 편집) ===# 이순신 자살설/은둔설과 반박 #=== 자살설/은둔설 주장 측은 이순신이 왜군을 추격하면서 갑옷을 벗고, 지휘관실에서 벗어나 적군의 사거리에 들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주장한다. 왜 이랬냐는 물음에는 이순신이 전쟁이 끝난 뒤에 [[선조(조선)|선조]]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전란 후를 생각했을때 모두를 위해서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주 헛소리는 아닌 것이, 전쟁이 끝난 후에 큰 공을 세워 유능하고 명망 높은 장수가 집권층의 질투와 두려움을 사 [[토사구팽]] 당하는 예는 인류 역사에서 적지 않다. 게다가 당시 임금인 선조는 이순신을 증오하여 전쟁 중에도 대놓고 그를 잡아들여 고문을 하는 등 이순신을 제거하려 한 전적도 있었으니 충분히 합리적 추측이다. 또한 이순신은 당시 조선 민중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전쟁이 끝나며 공적이 알려지면 인기는 더욱 늘 것이고, 그를 억압한 조정에 대한 반감은 급증했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자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군주인 선조의 의심병적인 성질로 미루어 볼 때 노량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후에 못볼 꼴을 당하지 않게 하였고, 그의 명예를 위해서 가장 잘 된 일이라고 생각들을 하곤 한다. 이순신이 생전에 명 수군 도독직을 받았다고 보는 측에서는 특히 이것 때문에 이순신이 자살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해당 논란에 관해서는 [[이순신/의문점]] 항목 참조. 이순신 자살설은 비단 현대뿐만이 아닌 조선 후기에도 심각하게 논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숙종(조선)|숙종]] 때의 영의정 이여는 "충무공이 총탄에 맞기를 자처했다"라고 말하고, 신료인 이민서도 "당쟁으로 [[김덕령]] 장군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김덕령의 죽음을 논하면서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이순신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 다만 이민서가 쓴 "갑옷을 벗고 싸웠다." 부분은 '열심히 싸운다'는 뜻의 관용적 표현임이 정설이다. 마치 발 벗고 나선다라는 표현이 실제 맨발이 아닌 적극적으로 앞장선다는 의미이듯] 또한 이후의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도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이이명은 "공이 아무리 앞에 다가올 화를 걱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겼겠는가?"라며 자살설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왕조 시대에 왕과 빚는 갈등으로 인해 자살설이 화제로 떠오를 정도면, 당시 왕을 섬기던 사대부들조차 선조의 처사를 도리에 맞지 않다고 본 것이다.] 사실 이순신 자살설이 수면에 오른 건 남천우 박사가 역사 비평에서 간행한[* 사실 이론이 너무나 허술하고 사료적 가치가 많은 편이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상대적으로 비주류인 역사 비평사에서 출간할 수 있었다.] 이순신 전기에서 다시 들고 나왔다. 문제는 남천우 박사가 '''자살설을 지지하는 게 아니고''' 자살설이 있으나 강하게 부인하면서 '''생존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은 죽은 게 아니라 부하들과 짜고 변복해 숨어 소실집이나 본가의 다른 방에 은거하다가 20년 후에 '''진짜로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 사망한 지 3일 뒤에 묻혔고 20년 뒤에 현재 위치에 이장한 건 맞으니까 사실은 그 때 안 죽고 이장할 때 죽었다는 논제.] 꽤 많은 사람들을 낚았으나 '''이는 근거가 전혀 없다.''' 남천우 박사는 이순신의 자서전을 발견했다고 했으나 그 자서전이라는 게 이분의 충무공 행록이다. 원래 숨어살면서 "나는..."이라고 쓴 자서전을 이분이 3인칭으로 바꾸었다는 이론이다. 그러니 낚이지 말자. 사실 이러한 자살설이 불거진 큰 이유는,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과 노량 해전의 처절함이 '''어쩐지 자살하기에 딱 좋은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인 맥락을 조금만 안다면 노량 해전은 생각 만큼 (조선 입장에서는) 처절한 전투도 아니었고, 이순신이 처한 상황 또한 자살하기에는 택도 없는 상황이었다, 는 주장도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선 노량 해전의 경우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작전에 말려들어 두들겨 맞기는 했으나 여전히 명군과 합세하더라도 150대 500척의 군사적 차이가 있었고 관음포로 도망간 상태에서 입구가 막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배수진을 쳤던 당시 일본군의 상황은 이제 이순신에게 겁먹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이곳을 뚫고가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살설이 이순신 장군의 군인 정신을 한편으로는 폄하할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 노량 해전은 이순신 스스로 그토록 원하던 전투였다. 이순신 본인이 일본군에게 가장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라 전투에 큰 심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객관적으로도 이순신은 조선 수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투 현장에서 전 수군을 지휘하고 명군의 말도 안 되는 행동과 명령을 중재하고 더 나아가 이의제기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막중한 권한과 임무를 짊어진 것을 알면서,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하늘에게 빌며 원했던 해전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자살하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남긴 공적과 군인 정신을 폄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순신 입장에서 이 노량 해전은 최후의 전투도 아니었다. 시마즈는 고니시 군을 구원하러 온 것이었기에 격파했을 뿐, 이순신의 가장 큰 목표는 시마즈가 아니라 고니시였다.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자가 뒤에서 살아남아버렸는데 '''그 책임감 강한 이순신 장군이 과연 자살을 하려 했을까?''' 만약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살아남았다면 곧바로 고니시를 부산까지 추격했을 것이며, 아예 부산 근처에 돗자리 펴 놓고 왜군이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제2차 [[부산포 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즉 정녕 이순신이 자살하겠다는 결심을 했어도 적어도 제2차 부산포 해전 쯤의 전투 막바지에나 했을 것이다.] 노량 해전 이후 조명연합군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군사력이 격렬하게 소모된 것도 있지만 이순신의 죽음으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게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전사했기 때문에 노량 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된 것'''이다. KBS 역사 프로그램에서 이순신 자살설 및 생존설을 주제로 다큐를 만들다가 문중의 항의로 내용을 바꾸어서 방영한 적이 있다. 이를 명량이 흥행했을 때 MBN 프로그램인 아궁이에서 다루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을 연구한 학자가 이런 설이 나도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 즉 위대한 영웅인 이순신이 적군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 있다는 것으로 합리화 한 것이라 평했다.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